일본의 동경에서 가장 번화하고, 젊은이들이 많은 곳을 들라고 한다면 누구나 시부야(渋谷)를 꼽을 것이다. 동경 전철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야마노테선의 거점이기도 한 시부야역 바로 앞에는 만남의 장소로 잘 알려진 하치코라는 개의 동상이 역을 향해 서 있다.

전철 역 앞에 하필 개동상이 서있을까 의아해지기도 하지만 이 하치코동상에는 눈물 없이는 보고 들을 수 없는 기가 막힌 사연이 깃들어 있다. 자신을 아껴주던 주인이 죽은 후 10년 동안이나 시부야 역 앞에서 주인을 기다렸던 충견이 바로 동상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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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부야 역을 바라보고 서있는 하치코 동상>

일본이 한창 제국주의의 꿈을 키우던 1923년 11월에 본토의 북쪽인 아키타(秋田)현 오오다테(大館)시의 사이토(斉藤)의 집에서 하치코는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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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치코가 태어난 아키타 현의 집>

사이토로부부터 하치코를 선물받은 우에노 교수는 하치코를 받았을 때 그의 나이는 53세였고, 그의 부인은 39세였다고 한다. 그는 양녀인 즈루코 부부와 하녀와 정원사, 서생 등을 식구로 거느리고 있는 큰 부자였다.

우에노 교수는 아키타 개를 무척 좋아해서 5마리나 길렀다. 그러나 웬일인지 그 개들은 1살이나 2살 정도가 되면 모두 죽고 말아서 마음의 상처를 크게 받고 있었던 때였다.

하치코는 그리 건강하지 못했는데, 우에노 교수의 극진한 간호에 힘입어 그해 장마가 끝났을 때는 아주 건강한 개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일 년 정도가 지나 성견으로 자란 하치코는 우에노 교수의 출퇴근을 배웅하고 마중하는 충견이 되었다..

개가 자꾸 죽자 우에노 교수는 그 때 포인터 종류의 일종인 John과 S도 키우고 있었는데, John이 하치코를 많이 보살폈다. 하치코가 성견이 된 후에는 세 마리의 개가 함께 교수를 배웅했는데, 하치코가 장소를 정확하게 기억해서 틀린 적이 없었다.

비가 오는 날도 눈이 내리는 날도, 그리고 바람이 부는 날도 어김없이 아침과 저녁으로 주인을 배웅하고 마중하는 그런 일을 일 년 남짓 했을 때 뜻하지 않은 비극이 하치코에게 닥쳐온다.

1925년 5월 21일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하치코의 배웅을 뒤로 하고 학교로 출근했던 우에노 교수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 그 날 교수회의를 마친 우에노 교수는 의자에 앉아서 다른 교수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뒤로 넘어져서 사망하고 만 것이다.

주인의 죽음을 알 턱이 없었던 하치코는 농학부 교문 앞에서 밤이 늦도록 기다렸지만 우에노 교수를 만날 수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하치코는 주인의 냄새가 배어 있는 유품이 있는 헛간에 들어가 삼일간이나 식음을 전폐하고 앉아 있기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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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지 않는 주인을 기다리는 당시의 사진>

4일째가 되는 25일 저녁에는 우에노 교수의 마지막 영결식이 준비되는 밤이었지만 주인의 죽음을 알지 못하는 하치코는 John과 S와 함께 우에노 교수를 맞이하기 위하여 시부야 역으로 나갔다. 그 후로도 늘 마중을 나갔는데, 하치코 혼자인 날이 많았다.

갑작스런 주인의 사망으로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우에노 교수의 부인은 혼인신고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 관계로 유산 상속 등의 권리를 가지지 못한 부인은 살림을 지탱할 수 없게 되었고, 친정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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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의 하치코 모습>

남편이 사랑하던 개들을 그냥 버릴 수 없었던 부인은 하치코와 John을 옷감장사를 하는 친척집 등에 맡겨졌다. 이집 저집에서 그럭저럭 지내던 하치코는 1927년 가을에는 또 다른 사람의 집으로 넘어가게 되었는데, 그 곳은 교수의 정원사 일을 했던 고바야시의 집이었다. 원래의 주인을 잃어버린 슬픔과 그리움으로 인해 하치코는 어디에 가도 행복해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서도 하치코는 시부야 역으로 교수를 마중 나가는 일을 거르지 않았는데, 그 집에서도 오래 견디지 못하고 가출을 해버린 하치코는 주인 없는 개가 되어서 들개 포획자들에게 쫓기기도 하고, 시부야역의 노점상들에게는 손님을 방해한다고 구박을 받기도 했다.

하치코의 이런 사연은 일본개보존협회를 조직했던 사이토우(斉藤)가 관심을 갖게 되면서 더욱 알려지게 되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모금에 동참을 했고, 이 사연을 전해 들은 미국의 어린아이들까지 성금을 보내왔다.

수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은 동상건립은 순조롭게 추진되어 시부야역을 바라보는 동상을 장소에 세워졌고. 동상이 세워진 뒤에도 하치코는 주인을 마중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는데, 유랑견이 되어 떠돌던 하치코는 1935년 3월 8일 오전6시 경에 죽은 시체로 발견됨으로서 13살의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주인을 마중하는 모양으로 시부야 역을 향해 앉아있는 모습을 취한 하치코의 동상은 그 후에도 또 한 차례의 비극을 겪어야 했다.

세계 지배를 꿈꾸며 전쟁에 광분하던 일본 제국주의는 연합군의 공세에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는데, 1944년에는 금속회수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이 훈령에 따라 하치코의 동상 역시 철거됨으로서 충견을 두 번 죽이게 되는 결과를 낳았는데, 이것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일본이 무조건 망할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는 회고를 하고 있다.

사람들의 예견처럼 1945년 8월에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그 후유증으로 시달리던 사람들이 정신을 차린 것은 1948년 여름이었다. 현재의 하치코 동상은 1948년에 다시 건립된 것이다.

주인을 섬기고 배웅하며, 마중하는 일을 천직으로 알았던 충견 하치코는 사람들이 가장 붐비는 시부야 역 앞에 오늘도 의연히 앉아서 주인을 기다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은 그 사연을 지금도 가슴에 새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