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기춘은 너무나 아쉬웠다. 연장 종료 23초를 남기고 다리잡아매치기로 유효를 내준 뒤 자리에 그대로 누웠다. 한참 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울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승자와 심판진이 모두 떠난 뒤에도 한동안 매트 위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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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 갈비뼈 부상으로 금을 놓친 불운과 지난해 용인의 한 나이트클럽에서의 20대 여성에 대한 손찌검 사건으로 물의를 일으킨데 대한 속죄까지 이번 아시안게임의 금메달로 모두 씻어내고 싶었는데.


 결승전까지 왕기춘은 승승장구했다. 8강에서는 인도의 라마쉬레이 야다브를 업어치기 한판으로 간단히 이겼고, 4강전에서는 다크호스 북한의 김철수를 누르기 한판으로 제압했다. 드디어 결승. 상대는 숙적 아키모토 히로유키. 올해 세계선수권 4강전에서 판정패로 자신을 꺾어 대회 3연패를 좌절시킨 선수다. 더구나 상대는 정상의 컨디션이 아니었다. 4강전에서 발목 부상을 당한 아키모토는 왕기춘에게 적수가 될 수 없었다.


 예상대로 경기는 왕기춘의 압도적인 우위 속에 진행됐다. 하지만 왕기춘의 공격은 단조로웠다. 유도 선수들이 흔히들 잡기 과정에서 보여주는 발목 공격을 하지 않았다. 주특기인 업어치기 공격에만 주력했다. 아키모토는 수비에 급급했다. 그럼에도 심판은 지도를 주지 않았다. 종료 23초전 왕기춘은 공격을 벌이다 아키모토로부터 역습을 당했다. 몸을 돌려 떨어졌지만 심판들은 유효를 선언했다. 골든스코어제로 치러지는 연장전. 패배였다.


 그러나 왕기춘은 비운의 은메달리스트만은 아니었다.

경기를 마친 뒤 상대방의 부상 부위에 대한 공격을 피한 그의 페어플레이에 대한 찬사가 쏟아지고 있다.


 금메달리스트 아키모토는 “나의 부상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이용하고 싶었을 텐데 그러지 않은 것에 대해 존경과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아키모토는 준결승을 치르다 왼쪽 발목을 다쳐 결승에서 내내 절룩이는 모습을 보였지만 왕기춘은 주로 업어치기 공격을 폈다. 경기를 압도했지만 기술은 단조로울 수밖에 없었다. 유도 선수들이 잡기 과정에서 흔히 하는 발목 공격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아키모토는 “지도를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자신의 말처럼 수비에만 치중했다.


 경기가 끝난 뒤 일본 언론은 왕기춘에게 ‘왜 다친 발목을 공략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했다. 왕기춘은 “아키모토가 발목을 다친 것을 알고 있었지만 부상 부위를 노리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해서 이기고 싶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왕기춘은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왜 그랬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며 “내가 넘기지 못해 졌으니 다음번에는 넘길 수 있도록 열심히 하겠다”는 말만 하고 자리를 떴다.


  베이징 올림픽에 이어 또 한 번의 불운에 속울음을 삼켜야했지만 왕기춘은 페어플레이를 통해 45억 아시아인들에게 금메달리스트 못지않은 강한 인상을 남겼다.

 

 

   출처 : 한겨레신문 e뉴스팀 2010-11-16